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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카지노커뮤니티 온라인카지노 바카라 먹튀검증사이트 카지노가리 &amp;gt; 커뮤니티 &amp;gt; 유머/이슈게시판</title>
<link>https://casinoleak.com/bbs/board.php?bo_table=humor</link>
<language>ko</language>
<description>유머/이슈게시판 (2026-05-11 09:33:45)</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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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좋은글]  소혜왕후인수대비 3편</title>
<link>https://casinoleak.com/bbs/board.php?bo_table=humor&amp;amp;wr_id=7747</link>
<description><![CDATA[■ 소혜왕후인수대비 3편 <br/><br/>■ 소혜왕후(인수대비) 3편 <br/><br/>1469년 11월 28일 자을산군, 즉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사가에 머물던 한씨는 왕의 어머니(대비)로서 다시 궁궐로 돌아왔다. 청상과부가 되어 궁궐을 떠난 지 12년만이었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의경세자의 위호(位號:벼슬의 등급 및 이름)와 어머니의 위상 문제가 거론되었다. 성종 1년에 의경세자의 시호를 온문의경왕(溫文懿敬王)으로 하고, 수빈의 휘호를 인수왕비(仁粹王妃)로 하여 예종비와 인수왕비를 형제의 서열로 차서(次序:순서)를 정하였다. 그리고 2년 뒤 인수대비는 남편이 덕종(德宗)으로 추존됨에 따라 덕종비(德宗妃)가 되었다. 사실 인수대비는 생전의 존칭이었고, 죽어서는 소혜왕후(昭惠王后)라는 시호를 받았다.<br/><br/>어려서 부모와 남편을 잃은 탓에 인수대비는 불교에 심취하였고, 성종이 도첩제(度牒制:승려허가증)를 실시하여 불교를 탄압하자, 이에 불만을 품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리학의 이념은 여성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특히 여성에게 요구된 가장 큰 임무 중의 하나는 ‘현모양처(賢母良妻)’로 규정되는 남편을 잘 섬기고,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었다. 여성에게 유교적인 덕목을 가르치기 위해서 일종의 교재가 필요했는데, 왕실 어른으로서 늘어가는 왕실 여성들을 교육시켜야 하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한 인수대비는 1475년(성종6년) 궁중의 비빈(妃嬪)과 부녀자들을 훈육하기 위해 내훈(內訓)이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 39살이었다.<br/><br/>인수대비는 이 책에서 부인들의 모범적인 사례를 들어 이해도를 높이고 부부의 도리, 형제와 친척 간의 화목 등 여성으로서 갖춰야 할 유교 덕목을 실어 여성도 유교적 도리를 알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원리가 기본이 되는 오늘날의 기준에는 맞지 않는 내용일 것이다. <br/><br/>인수대비의 일생에 있어서 며느리 윤비(尹妃)와의 관계는 그야말로 불행 중의 불행이었다. 이상적인 여성상을 목표로 한 인수대비에게 윤비는 성에 차지 않는 며느리였다. 원래 성종의 부인은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였으나, 그녀가 1474년 후사 없이 일찍 죽는 바람에 연산군을 잉태한 후궁 윤씨가 중전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인수대비 한씨와 왕비 윤씨는 서로 성격상 물과 기름같이 섞일 수 없는 생각과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인수대비에게 막강한 친정 세력이 있었다면, 윤비는 그렇지 못했다. 가난한 대간(臺諫) 집안 출신의 딸로서 그를 후원해 줄 부친도 없는 신세였다. 또한 유교적 부덕을 완벽하게 실천하고 강요했던 인수대비와 달리 윤비는 자유 분방하고 사랑을 중요시하여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성종은 그렇게 지순한 사랑을 주는 인물이 아니었다.<br/><br/>- 4편에 계속<br/><br/>♣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<br/><br/>출처: <A HREF="http://hongdaearea.blogspot.com/2024/04/3_5.html" TARGET="_blank"  rel="nofollow">http://hongdaearea.blogspot.com/2024/04/3_5.html</A>]]></description>
<dc:creator>감문철</dc:creator>
<dc:date>2026-05-11T09:33:4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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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좋은글]  소혜왕후인수대비 4편</title>
<link>https://casinoleak.com/bbs/board.php?bo_table=humor&amp;amp;wr_id=7746</link>
<description><![CDATA[■ 소혜왕후인수대비 4편 <br/><br/>■ 소혜왕후(인수대비) 4편 <br/><br/>인수대비는 《내훈》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며느리가 잘못하면 이를 가르칠 것이고 가르쳐도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릴 것이고, 때려도 고치지 않으면 쫓아내야 한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이 말은 그대로 실행되었다. 유학적 소양을 갖춘 엄격한 성격의 인수대비는 윤비의 행동을 결코 용납하지 못하였다. 인수대비는 윤비의 폐출(廢黜)과 사사(賜死)에 깊이 관여했고, 이는 평탄하지 않은 불행한 미래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br/><br/>성종 주변에는 많은 여성들이 있었고, 윤비는 이를 참지 못했다. 성종이 엄귀인과 정귀인을 총애하자 윤비는 왕의 총애를 되찾고자 했다. 왕실 여성들 사이에는 이른바 압승(壓勝)이라 불리는 이른바 저주행위가 있었는데, 들키게 되면 큰 화(禍)가 되었다. 윤비의 처소에서 극약인 비상과 이를 바른 곶감이 발견되자, 인수대비와 성종은 이 곶감이 왕과 후궁을 죽이려는 의도라 생각했다. 야사에는 윤씨가 성종과 다투면서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고도 하나, 확실치는 않다. 결국 윤비는 왕비가 된지 8개월 만에 폐비(廢妃)가 되어 사가로 쫓겨났고,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받아 결국 1482년(성종13년) 8월에 사사(賜死)되었다. <br/><br/>대신들은 윤씨의 폐비와 사사 문제를 원자의 친모라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성종의 입장은 단호했다. 인수대비 또한 폐비 윤씨가 살아 있으면 화근(禍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폐비 윤씨를 대신하여 윤호의 딸 파평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파평 윤씨는 대비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고, 인수대비는 “이제 중전다운 사람이 들어왔으니 낮이나 밤이나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며 기뻐했다. 며느리를 죽임으로써 후환을 없애고자 생각한 인수대비의 판단은 완전 오판(誤判)이었다. 윤씨를 죽인 이듬해 인수대비는 정희왕후(세조 비)와 함께 온양을 갔는데, 여기서 정희왕후가 죽고, 성종 또한 재위 2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성종은 자신의 사후 100년 동안 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을 절대로 공론화 하지 않도록 유언을 남겼다. <br/><br/>인수대비는 왕위에 오른 손자 연산군으로부터 많은 원망을 받았다.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연산군은 폭군으로 변해갔고, 방탕한 생활로 국정을 파멸로 몰아갔다. 인수대비는 연산군의 광폭함을 누차 지적하고 타일렀으나 오히려 원망만 살 뿐이었다. 연산군은 부친의 후궁이자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엄숙의(嚴淑儀)와 정숙의(鄭淑儀)를 궁 안뜰에 결박하고서는 아들인 안양군 항(㤚)과 봉안군 봉(㦀)을 불러 모친들을 때리게 만들었다. 이어서 분이 풀리지 않은 연산군은 항과 봉의 머리채를 쥐고 인수대비의 침전으로 가 방문을 열고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하며, 항을 독촉하여 술잔을 드리게 하니, 인수대비가 놀라 잔을 받았다. 연산군은 엄숙의·정숙의를 죽인 뒤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을 담그고 산과 들에 흩어 버렸다고 하나 진위는 확실치 않다. <br/><br/>- 5편에 계속<br/><br/>♣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<br/><br/>출처: <A HREF="http://hongdaearea.blogspot.com/2024/04/4_5.html" TARGET="_blank"  rel="nofollow">http://hongdaearea.blogspot.com/2024/04/4_5.html</A>]]></description>
<dc:creator>감문철</dc:creator>
<dc:date>2026-05-11T09:32:31+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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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좋은글]  소혜왕후인수대비 5편</title>
<link>https://casinoleak.com/bbs/board.php?bo_table=humor&amp;amp;wr_id=7745</link>
<description><![CDATA[■ 소혜왕후인수대비 5편 <br/><br/>■ 소혜왕후(인수대비) 5편 <br/><br/>연산군의 광폭함을 모두 지켜 본 인수대비는 병들어 자리에 누웠다. 어느 날 연산군이 찾아오자 갑자기 일어나 바로 앉으면서, “이 사람들이 모두 부왕의 후궁인데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하며 분노했다. 이 말에 흥분한 연산군은 자신의 머리로 할머니 인수대비의 몸을 들이 받았다.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는 설(說)도 있다. (설마........)충격을 받은 인수대비는 “흉악하구나.” 하며 자리에 누운 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노약한 인수대비는 연산군과의 갈등과 마찰 속에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은 할머니의 죽음에 이르러서도 슬퍼하기는커녕 3년 상(喪)까지 폐지할 정도로 원한을 품었다.<br/><br/>&nbsp;&#034;<br/>남편의 죽음으로 잃어버렸던 왕비 자리를 아들을 통해 대비 자리로 보상받은 인수대비 한씨는 시부모인 세조 내외로부터 효부(孝婦)라는 글귀가 새겨진 도장을 받을 정도로 부덕을 갖춘 여성이었다. 21살에 청상과부가 된 이후로 자식 교육과 아랫사람을 경계함에 추호의 빈틈도 없어 ‘폭빈(暴嬪)’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완벽함을 추구하였다. 그녀의 강한 집념은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리는 동력이 되었으나, 한편으로 폐비 윤씨를 부덕한 여성으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써 조선 왕실의 최대 비극이라 할 수 있는 연산군의 폭정을 만들어냈다.<br/>&#034;, <br/><br/>파란만장한 그녀의 삶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도 우여곡절 끝에 왕비를 거치지 않고 대비에 오른 특이한 이력을 가진 여성으로, 며느리를 쫓아낸 비정의 시어머니로 묘사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 여성 지식인의 대표 격으로 그녀의 삶과 업적이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는 재평가도 나오고 있다. 여성 교양서가 없었던 시절에 여성도 교육받아야 한다는 진보적인 생각을 한 인수대비였지만, 그녀가 생각한 여성의 교양은 남성을 우위에 둔 여성의 부덕(婦德)이었다. 또한 유교적 부덕을 갖추지 못한 여성은 비록 왕비라 해도 내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조선 성종 대는 우리 역사에서 유교이념이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시기였다. 여성의 유교적 부덕이 국가적 차원에서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br/><br/>소혜왕후(인수대비)는 덕종(의경세자)과 함께 동원이강형(정자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능이 형성)으로 조성된 경릉에 안장되었다. 경릉은 의경세자가 죽자 세조가 친히 수차례 묏자리를 물색하게 하고 산형도(山形圖)를 그려 친히 선지(宣旨:임금의 명을 내림)를 했다. 기록상 역대 가장 많은 곳의 상지(相地·자리 잡기)였을 만큼 수많은 곳을 찾았으니, 마지막에 오늘날의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으로 결정됐다. 1457년 10월 24일 세조는 세자의 조묘도감(왕릉을 조성하는 기관은 ‘산릉도감’인데 세자와 왕세자비 등의 능은 조묘도감이라 함.)에 무덤 안은 마땅히 후하게 하고, 무덤 밖의 석물은 간소하게 하라는 전지(傳旨)를 내렸다. “백성을 번거롭게 하고, 죽은 자에게는 유익할 것이 없다”는 세조의 능역 간소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br/><br/>경릉은 조선시대 최초로 조성된 세자의 묘(원)다. 조선시대에는 왕이나 왕비의 능침은 능(陵)이라 하고, 세자나 세자빈, 왕의 사친의 무덤은 원(園)이라 했다. 의경세자는 후에 덕종으로 추존받았으므로 능(陵)이라 부른다. 특이한 것은 인수대비의 능이 남편인 덕종의 능보다 더 화려하고 더 높은 위치에 묻혀 있으며 석물도 덕종의 능보다 인수대비 능이 더 많다는 것이다. 그것은 덕종은 세자일 때 승하했지만, 인수대비는 왕실 최고의 어른인 대왕대비일 때 승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인수대비(소혜왕후)의 묘는 손자인 연산군이 조영했으므로 석물 등의 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br/><br/>♣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<br/><br/>출처: <A HREF="http://hongdaearea.blogspot.com/2024/04/5_32.html" TARGET="_blank"  rel="nofollow">http://hongdaearea.blogspot.com/2024/04/5_32.html</A>]]></description>
<dc:creator>감문철</dc:creator>
<dc:date>2026-05-11T09:31:1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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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좋은글]  황희 1편</title>
<link>https://casinoleak.com/bbs/board.php?bo_table=humor&amp;amp;wr_id=7744</link>
<description><![CDATA[■ 황희 1편<br/><br/>■ 황희 1편<br/><br/>황희(1363년~1452년)는 고려시대(공민왕12년)에서 조선시대(문종2년)에 걸쳐 관직에 있으면서 누구나 인정하는 조선 최고의 명재상(名宰相)이다. 세종의 모든 업적은 황희라는 명재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만큼, 그는 명망 높고 관리들의 롤모델이 되는 모범적인 관리였다. 후대 벼슬아치들의 청렴을 강조할 때마다 황희의 이름이 어김없이 등장하며, 조선시대 청렴한 벼슬아치를 뽑아서 청백리로 지정하고 기릴 때에도 언제나 그의 이름이 맨 앞줄에 올랐다. <br/><br/>황희는 고려가 망할 징조가 뚜렷했던 혼란한 시기에 태어났고, 세종의 탁월한 정책들이 이룩되어 조선왕조의 기틀이 다져진 뒤에 죽었다. 조상의 고향은 남원(또는 장수)이었으나, 그는 개경에서 태어났다. 그가 성균관에서 학관(學官)으로 있을 때 고려가 망했는데, 그는 고려에 대한 충절을 달랠 길 없어 개경 언저리에 있는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유능한 그를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그는 끝내 이성계의 끈질긴 간청을 물리치지 못해 뜻을 꺾고 벼슬에 올랐다.<br/><br/>황희는 조선왕실에 들어와서 세자를 가르치는 우정자(右正字)를 시작으로, 태종 때는 6조 판서를 두루 지냈다. 그에 대한 태종의 신임은 아주 두터웠다. 태종은 그에게 “이 일은 나와 경만이 알고 있소. 만약 누설된다면 경 아니면 내가 한 것이오.” 라고 하면서, 기밀업무를 전담하게 했다. 또한 하루 이틀이라도 만나지 못하면 꼭 불러다가 둘이 의견을 나누었다. <br/><br/>그런데, 태종16년 11월, 황희에 대한 태종의 신임에 금이 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세자인 양녕대군이 점점 더 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자, 태종은 황희를 불러 의논하였다. 황희는 “세자가 아직 젊어서 그러한즉 큰 허물은 아닙니다.” 라고 대답했다. 태종은 황희가 양녕대군을 두둔한 것으로 오해하여 좌천 시켜버렸다. 이후 태종18년에 판한성부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4개월 만에 양녕대군에 대한 폐위 논의가 일어났고, 황희는 이때 또 폐위를 반대하였다. 이에 다시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경기도 교하로 귀향 갔다가 다시 남원으로 옮겼다.<br/><br/>그러나 태종은 일찍부터 황희를 재상감으로 지목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세종이 등극하자 태종은 상왕이 되어 국정의 일부를 전담하였는데, 이때 세종에게 이르기를 “전날의 일은 어쩌다가 그릇된 것이다. 이 사람은 끝내 버릴 수 없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하며 황희를 예조판서에 제수했다. 세종7년(1425년)에 대사헌을 지냈고, 이어서 이조판서를 걸쳐 우의정이 되었다. 세종 13년(1431년)에 영의정이 되었는데, 이후 세종 31년(1449년)에 사임할 때까지 영의정으로 재임하면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br/><br/>- 2편에 계속<br/><br/>♣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<br/><br/>출처: <A HREF="http://hongdaearea.blogspot.com/2024/04/1_51.html" TARGET="_blank"  rel="nofollow">http://hongdaearea.blogspot.com/2024/04/1_51.html</A>]]></description>
<dc:creator>감문철</dc:creator>
<dc:date>2026-05-11T09:30:03+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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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좋은글]  황희 2편</title>
<link>https://casinoleak.com/bbs/board.php?bo_table=humor&amp;amp;wr_id=7743</link>
<description><![CDATA[■ 황희 2편<br/><br/>■ 황희 2편<br/><br/>황희는 관직에 들어선 뒤, 한 번의 유배와 두 번의 가벼운 파직을 겪었다. 그가 유배당한 것은 양녕대군의 폐위와 충녕대군(세종)의 세자책봉을 크게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양녕대군이 적자이므로, 적자를 제치고 다른 아들로 세자를 삼으면 후세에 큰 환란의 불씨가 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는 또 양녕대군의 인물됨을 잘 알고 있었고, 양녕의 두터운 친구이기도 했다. 이때 그는 파주 교하에 유배되었다. 가까운 곳에 두려는 태종의 배려였다. 하지만 그에게 죄를 주어야 한다고 대신들이 거듭 주장하자, 그의 조상 고향인 남원으로 유배지를 바꾸었다. 태종은 그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유배생활을 하도록 특전을 베풀었다. 그는 남원 유배지에서 3년을 보내면서 문을 닫아걸고 친구도 만나지 않으며 글 읽기에만 열중했다.<br/><br/>또 그가 파직된 것은 좌의정으로 있을 때, 그의 지인 태석균(太石鈞)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투옥되었을 때였다. 그는 사헌부에 태석균의 감형을 부탁했다는 죄로 잠시 파직되었다. 이 두 가지 경우 말고는 탄탄한 길을 걸은 셈이다.<br/><br/>세종은 자신의 세자책봉을 반대한 황희를 왕위에 오른 지 3년 뒤인 1422년 좌참찬으로 발탁했다. 사사로운 감정을 떠난 인사였다. 그 뒤 두 사람은 평생을 두고 공적으로는 군신의 관계였고, 사적으로는 둘도 없는 친구의 관계였다.<br/><br/>세종은 말년에 궁내에 부처를 모시는 내불당(內佛堂)을 조성하려고 했다. 하지만 조선은 유교정치 이념을 표방하는 국가이므로 세종의 내불당 조성은 큰 반대에 부딪쳤다. 집현전 학사들은 일제히 업무를 접고 귀가하는 요즘으로 치면 파업을 벌였다. 이에 마음이 상한 세종은 텅 빈 전내(殿內)를 휘둘러보며 옆에 있던 황희(黃喜)에게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했다. 이에 황희는 집현전 학사들을 달래 끝내 내불당을 조성할 수 있게 하였다. 세종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렸고, 세종의 정책에 둘도 없는 조력자가 되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즈음 선비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을 때에도, 또 천첩 소생들에게 비천한 일을 면제하는 조치를 내리려 하여 양반들이 반발할 때에도 세종을 돕고 이해하고 감쌌던 인물이었다. <br/><br/>황희가 죽었을 때 사관은 이렇게 평가했다. 인물평가에 짠 사관이 남다른 찬사를 한 것이다.<br/><br/>『성품이 관후하고 신중하여 재상으로서 식견과 도량이 있었다. 모습이 풍만해 특출하였고 뛰어나게 총명했다. 가정을 다스림에는 검소했고 기쁨과 노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일을 따질 때에는 공명정대하여 원칙을 살리기에 힘썼으며 마구 뜯어고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 《문종실록》 권12, 2년2월조 - <br/><br/>- 3편에 계속<br/><br/>♣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<br/><br/>출처: <A HREF="http://hongdaearea.blogspot.com/2024/04/2_73.html" TARGET="_blank"  rel="nofollow">http://hongdaearea.blogspot.com/2024/04/2_73.html</A>]]></description>
<dc:creator>감문철</dc:creator>
<dc:date>2026-05-11T09:28:4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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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좋은글]  황희 3편</title>
<link>https://casinoleak.com/bbs/board.php?bo_table=humor&amp;amp;wr_id=7742</link>
<description><![CDATA[■ 황희 3편<br/><br/>■ 황희 3편<br/><br/>황희는 조선 초기에 활동한 훌륭한 정치가로 첫손가락에 꼽힌다. 또 청빈과 근면을 생활지표로 삼았다. 오늘날 공직자들이 본받아야할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무골호인(無骨好人)으로 보일 행동을 많이 했다. 그가 순하고 사람 좋기로 알려진 유명한 일화가 있다.<br/><br/>어느 날, 자기 집 계집종들이 싸움박질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 한 계집종이 황희 앞으로 달려와 고자질을 하자,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러자 다른 계집종이 억울하다는 듯이 달려와서 울며 말했다. “대감마님, 거짓말입니다.” 하자, “그래, 네 말도 옳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황희의 아들이 물었다. “어찌 아버지께서는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다고 하십니까?” 황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네 말도 옳구나!”<br/><br/>그러나 그는 결코 무골호인(無骨好人)만은 아니었다. 그는 세상 자질구레한 일들에 대해서는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한 치의 빈틈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는 작은 일에는 너그럽고 큰일에 엄격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청렴결백했다. 벼슬자리에 오르면 그 권세로 재물을 늘리는 도구로 삼는 자들이 많다. 하지만 그는 녹봉(祿俸:나라의 봉급)만으로 가족과 종들의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러다 보니 늘 살림은 쪼들렸고, 그의 집은 지붕을 제대로 잇지 못해 늘 비가 샜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비 오는 날이면 방 안에서 우산을 받치고 책을 읽었다고 하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다. 그는 공직자로서의 몸가짐을 철저히 했고, 친척이나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벼슬자리를 주지 않고, 과거시험이나 능력에 따라 정당하게 벼슬을 주도록 했다. <br/><br/>그는 90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그가 죽자, 임금은 3일 동안 조회를 중지했다. 『조정에서나 민간에서나 모두 놀라고 탄식하면서 조상(弔喪)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여러 관청의 아전들과 종들도 모두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 지냈으며, 이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 《문종실록》 권12, 2년2월조 -<br/><br/>오늘날 그의 유적은 파주 일대에 보존되어 있다. 특히 임진강 언덕 위에 있는 반구정(伴鷗亭:기러기와 벗하는 정자)은 그가 만년에 임진강 철새들을 바라보면서 유유자적했던 곳이다. <br/><br/>황희의 초상화는 불행하게도 일본의 천리대학에 소장되어 있는데, 초상화를 보면 무골호인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고 한다. 체격이 크고 가슴과 어깨가 벌어져 있으며, 수염과 짙은 구렛나루가 무인(武人)과 같은 인상을 주기까지 한다. 실제로 그의 행적과 조선 전기의 야사를 보면 그는 도량이 크고 선이 굵은 인물로, 소소한 일에 구애 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br/><br/>♣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<br/><br/>출처: <A HREF="http://hongdaearea.blogspot.com/2024/04/3_36.html" TARGET="_blank"  rel="nofollow">http://hongdaearea.blogspot.com/2024/04/3_36.html</A>]]></description>
<dc:creator>감문철</dc:creator>
<dc:date>2026-05-11T09:27:3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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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좋은글]  간신 임사홍 1편</title>
<link>https://casinoleak.com/bbs/board.php?bo_table=humor&amp;amp;wr_id=7741</link>
<description><![CDATA[■ 간신 임사홍 1편<br/><br/>■ 간신 임사홍 1편<br/><br/>1504년 연산군 때 일어난 비극적인 갑자사화(甲子士禍)의 신호탄을 올린 간신 임사홍(任士洪,1445~1506)은 두 아들을 부마(駙馬:임금 사위)로 만들어 왕실과 인연을 맺으면서, 세조에서 연산군 대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탄탄대로를 걸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처형을 당했고, 연산군의 악행(惡行)과 패륜(悖倫)적 행동을 부추긴 간신의 대명사로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당대에 정치적 출세와 부귀영화를 누리기는 했으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함은 물론, 우리 역사에 영원한 간신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br/><br/>임사홍의 본관은 풍천(豐川)이고, 자는 이의(而毅)이다. 처음 이름은 사의(士毅)였으나 뒤에 사홍(士洪)으로 개명하였다. 효령대군의 손녀딸이자 보성군 이합의 딸인 전주 이씨와 결혼하여 왕실의 인척이 되었다. 임사홍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세 아들 중 두 명을 왕실의 사위로 만들었다. 첫째 아들 임광재(任光載)는 예종(睿宗)의 딸인 현숙공주(顯肅公主)와 결혼하였고, 넷째 아들 임숭재(任崇載)는 성종(成宗)의 딸인 휘숙옹주(徽淑翁主)와 혼인하였다. 이렇게 임사홍은 왕실과 이중으로 혼인관계를 맺어, 부마 집안으로써 권력의 핵심에 자리잡게 되었다.<br/><br/>그런데 당시에도 이러한 왕실과의 정략적 혼인관계로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좋게 보진 않았던 것 같다. 임사홍의 아들인 임숭재가 휘숙옹주와 혼인한 것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한 사관(史官)의 기록이 남아있다. 두 사람이 혼인하는 날 밤 임사홍의 집에서 불이 났는데, 사관은 이것을 복이 지나쳐 재앙이 발생한 것이라고 비평했다. 『임사홍은 소인(小人)이다. 불의(不義)로써 부귀를 누렸는데도, 그 아들 임광재가 공주와 혼인을 했고, 지금 임숭재가 또 옹주에게 장가를 갔으니, 복이 지나쳐 도리어 재앙이 발생하여 그 집에 불이 난 것이다.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재앙을 주니, 천도(天道)는 속이지 않는 것이다.』 <br/><br/>임사홍은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았고 글을 잘 지었다. 그 뒤 한성부의 저명한 문인에게 수학하였으나 그가 후일 간신의 대명사로 몰렸으므로 그의 스승이 누군가는 알려지지 않았다. 1465년(세조11년)에는 알성문과에, 1466년(세조12년)에는 사재감사정(司宰監司正)으로서 춘시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그는 시문과 서예 솜씨로 당대에 이름을 날리기도 했으며, 중국어에도 능통하여 관압사(管押使)·선위사(宣慰使) 등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던 성종은 임사홍이 종친(宗親:임금의 친족)임에도 불구하고 관직에 등용하여, 홍문관교리·승지·도승지·이조판서·대사간·예조참의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br/><br/>- 2편에 계속<br/><br/>♣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<br/><br/>출처: <A HREF="http://hongdaearea.blogspot.com/2024/04/1_24.html" TARGET="_blank"  rel="nofollow">http://hongdaearea.blogspot.com/2024/04/1_24.html</A>]]></description>
<dc:creator>감문철</dc:creator>
<dc:date>2026-05-11T09:26:2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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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좋은글]  간신 임사홍 2편</title>
<link>https://casinoleak.com/bbs/board.php?bo_table=humor&amp;amp;wr_id=7740</link>
<description><![CDATA[■ 간신 임사홍 2편<br/><br/>■ 간신 임사홍 2편<br/><br/>임사홍은 조정 공신들과 외척들이 권력을 남용한다고 비판하였으며, 당대 권신인 한명회, 신숙주 등의 월권행위를 줄기차게 비난하기도 했다. 그래서 조정의 대신들에게 ‘소인배’라는 말을 들을 만큼, 임사홍은 조정 대신들의 공공의 적(敵)으로 몰리게 된다. 하지만, 종친세력인 동시에 성종의 총애로 탄탄대로를 걷던 임사홍도 1478년(성종9년) ‘흙비사건’으로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게 되었다. <br/><br/>‘흙비’는 지금으로 말하면 ‘황사(黃砂)비’를 말하는데, 1478년 4월 초하루에 흙비가 심하게 내리자, 사람들은 이를 하늘의 변괴로 생각하여 모두 두려워하였다. 이에 사간원·사헌부·홍문관에서는 성종에게 이것을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여 근신해야 하며, 당분간 전국에 금주령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도승지 임사홍은 흙비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재앙(災殃)으로 보지 않았고, 국가의 제사가 연이어 있는 이 시점에서 술을 금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br/><br/>이에 삼사(三司: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에서는 임사홍을 맹렬히 성토했다. 그들은 임사홍을 소인(小人)이라 하고, 그가 하는 말은 모두 아첨에서 나온 응큼하고 간사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임사홍의 아버지인 임원준까지 탐오(貪汚: 욕심이 많고 하는 짓이 더러움)한 사람이었음을 언급하며, 가풍이 바르지 못하여 임사홍이 간사한 인간이라고 몰아갔다. 이처럼 대간들이 임사홍을 심하게 탄핵한 이유는, 임사홍이 성종의 총애를 믿고 거만하게 행동하는 것이 꼴 보기 싫었을 뿐만 아니라, 왕실과 혼인으로 맺어진 연줄을 이용하여 권력을 누리고 국정을 농단(壟斷: 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함)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br/><br/>성종은 처음에는 대간들의 탄핵을 제지하며 임사홍을 감싸주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대간들의 탄핵이 점점 격화되자, 성종도 대간들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때 효령대군의 손녀인 임사홍의 부인이 남편의 무고함을 상소했다. 그리고 첫째 며느리인 현숙공주(당시에는 정숙공주라 함)는 아버지 예종이 돌아가신 후로 임사홍을 친아버지와 같이 의지하고 있다며 울면서 읍소(泣訴)했다. 이처럼 왕실의 여인들까지 나서서 만류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br/><br/>결국 임사홍은 의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임사홍의 당인(黨人)이었던 유자광(柳子光)도 동래로 유배를 갔다. 그 뒤, 유자광과 임사홍은 성종이 죽을 때까지 숨죽이며 복수의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성종 사후 연산군이 즉위하자, 마침내 그들은 연산군의 비위를 맞추면서 재기할 수 있었고, 각각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라는 피비린내 나는 사화를 주도하는 주역이 되었다. <br/><br/>- 3편에 계속<br/><br/>♣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<br/><br/>출처: <A HREF="http://hongdaearea.blogspot.com/2024/04/2_38.html" TARGET="_blank"  rel="nofollow">http://hongdaearea.blogspot.com/2024/04/2_38.html</A>]]></description>
<dc:creator>감문철</dc:creator>
<dc:date>2026-05-11T09:25:0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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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좋은글]  간신 임사홍 3편</title>
<link>https://casinoleak.com/bbs/board.php?bo_table=humor&amp;amp;wr_id=7739</link>
<description><![CDATA[■ 간신 임사홍 3편<br/><br/>■ 간신 임사홍 3편<br/><br/>연산군이 즉위하자, 임사홍은 막강한 권력자가 되어 화려하게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그가 정계로 돌아올 수 있도록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은 아들 임숭재와 며느리 휘숙옹주(성종의 딸)였다. 그 이유는 휘숙옹주가 많은 이복 여동생 중에서도 특히 연산군이 아끼는 여동생이었고, 그녀의 남편인 임숭재도 연산군은 특별하게 생각했다. 아들과 며느리 덕분으로 임사홍은 다시 권력을 잡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br/><br/>정계로 돌아온 임사홍은 자신을 쫓아냈던 이들을 향한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시작하였다. 성종이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문제를 100년이 지날 때까지는 아무도 논하지 말라’는 유명(遺命)을 남겼지만, 임사홍은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 문제를 일부러 끄집어내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다. 임사홍의 폭로로 시작된 사화가 바로 1504년(연산군10년)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다. 갑자사화는 임사홍이 자신의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수단으로도 활용하였기 때문에 사림파뿐만 아니라 훈구파 내에서도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br/><br/>자신의 생모가 참소(讒訴) 당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산군의 분노는 폭주하기 시작했고, 그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극형에 처하거나 이미 죽은 자들은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고(부관참시:剖棺斬屍), 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쇄골표풍:碎骨飄風). 더 나아가 시체를 강물에 던져 물고기 밥이 되게 하거나, 그 자제나 사위들까지 죽이거나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고 부인이나 딸은 종으로 삼았다. 천하의 한명회도 부관참시를 피하지 못할 정도로 연산군의 광기는 극에 달하였다.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이러한 잔인한 일들이 모두 임사홍이 사적인 감정을 품고 임금을 유도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평가했다.<br/><br/>임사홍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갑자년 이후로도 자기를 비난한 자에게 일일이 앙갚음하고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모두 참시(斬屍)하는데 열을 올렸다. 당시에 사람들이 임사홍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온 조정이 그를 승냥이나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여 비록 두 신씨(愼氏: 당시 실세였던 왕비 신씨의 오빠들)들도 조심스럽게 섬겼다. 연산군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곧 그에게 쪽지로 통지하고, 임사홍은 바로 들어가 시행하여 명령이 내려지니, 그가 부도(不道)한 것을 유도한 일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연산군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br/><br/>국역조선왕조실록 중종 1년 병인(1506) 9월2일 기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 <br/><br/>『연산군 시대의 간신 임사홍(任士洪)과 아들 광재(光載:공주의 남편), 숭재(崇載:옹주의 남편)등을 사람들이 미워했는데, 그때 사람이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어 읊었다.<br/><br/>小任崇載大任洪(작은 소인 숭재, 큰 소인 사홍이여!) <br/><br/>千古姦兇是最雄(천고에 으뜸가는 간흉이구나!)<br/><br/>天道好還應有報(천도는 돌고 돌아 보복이 있으리니, 알리라)<br/><br/>從知汝骨亦飄風(네 뼈 또한 바람에 날려질 것을.)』<br/><br/>- 4편에 계속<br/><br/>♣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<br/><br/>출처: <A HREF="http://hongdaearea.blogspot.com/2024/04/3_79.html" TARGET="_blank"  rel="nofollow">http://hongdaearea.blogspot.com/2024/04/3_79.html</A>]]></description>
<dc:creator>감문철</dc:creator>
<dc:date>2026-05-11T09:23:51+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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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좋은글]  간신 임사홍 4편</title>
<link>https://casinoleak.com/bbs/board.php?bo_table=humor&amp;amp;wr_id=7738</link>
<description><![CDATA[■ 간신 임사홍 4편<br/><br/>■ 간신 임사홍 4편<br/><br/>임사홍의 간교함은 자신의 아들마저 희생양으로 삼는 지경에 이르렀다. 임희재는 임사홍의 둘째아들로 사림파 영수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 무오사화 때 유배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 임사홍이나 동생 임숭재와 달리, 연산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하루는 연산군이 임사홍의 집에 갔다가 병풍에 적혀 있는 시를 보게 되었다.<br/><br/>祖舜宗堯自太平(요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br/><br/>秦皇何事苦蒼生(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들을 괴롭혔는가)<br/><br/>不知禍起所墻內(화가 집안에서 일어날 줄은 모르고) <br/><br/>虛築防胡萬里城(공연히 오랑캐를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 <br/><br/>이 시는 임희재가 쓴 것으로, 겉으로는 진시황을 비판하고 있는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진시황에 빗대어 연산군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연산군은 불편한 심기를 내보이며 누가 쓴 것인지를 물었고, 임사홍은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연산군은 “경의 아들이 불충하니, 내가 그를 죽이려고 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그의 뜻을 물었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지적에 바로 동의를 했고, 결국 임희재는 처형되었다. 혹자는 임희재가 항시 그 아버지의 잘못을 간하였으므로, 임사홍이 그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참소(讒訴)한 것이라고 하는 설(說)도 있다. 설마 아무리 간신배 임사홍이라 해도 자신의 아들 목숨까지 내버릴 수 있었을까. <br/><br/>여하튼, 임희재 사건 이후 연산군은 그를 더욱 신임하였고, 사람들은 그를 더욱 잔인한 사람으로 여겨 매우 경계하게 되었다.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잔치를 열었던 임사홍. 그에게 있어서 권력의 단맛은 아들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후 임사홍은 연산군의 입맛에 맞는 최측근으로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조선 팔도의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 연산군에게 바치는 채홍사(採紅使)로 임명된 것이다. 임사홍은 채홍사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운평(運平: 연산군 때에 여러 고을에 모아놓은 가무기생)과 흥청(興淸:운평 가운데서 대궐로 뽑혀온 기생)을 뽑아 연산군에게 바쳤다. <br/><br/>흥청들과 어울려 ‘흥청망청’하고 폭정(暴政)을 일삼던 연산군은 결국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종말을 맞았고, 최측근 임사홍 역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뒤 20여일 후 부관참시 당하고 가산(家産)을 몰수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몰수된 재산의 일부는 한때 함께 사화를 일으켰지만, 중종반정 공신으로 배를 갈아 탄 또 다른 간신 유자광에게 돌아갔다. 그리하여 임사홍에게는 조선시대 대표적 간신이라는 오명(汚名)과 낙인이 영원히 남게 되었다.<br/><br/>♣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<br/><br/>출처: <A HREF="http://hongdaearea.blogspot.com/2024/04/4_49.html" TARGET="_blank"  rel="nofollow">http://hongdaearea.blogspot.com/2024/04/4_49.html</A>]]></description>
<dc:creator>감문철</dc:creator>
<dc:date>2026-05-11T09:22:3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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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윤하율</dc:creator>
<dc:date>2026-05-02T10:41:13+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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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윤하율</dc:creator>
<dc:date>2026-05-01T15:48:1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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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윤하율</dc:creator>
<dc:date>2026-04-30T21:22:39+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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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윤하율</dc:creator>
<dc:date>2026-04-29T14:14:59+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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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윤하율</dc:creator>
<dc:date>2026-04-28T10:50:53+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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